미주도산안창호기념사업회
월간 도산

제4호2026년 4월

도산의 여권

파도와 철길과 먼지 위에 새긴 독립의 지도

파도와 철길과 먼지 위에 새긴 독립의 지도

월간도산 | 특집 기획

이 여권은 단순한 여행 증명서를 넘어 ’미주 한인 이민사 박물관’의 건립 명분을 뒷받침하는 가장 강력한 유물 중 하나입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발행 번호: 제51호 (참고로 부인 이혜련 여사는 바로 다음 번호인 제52호입니다.)

발행 날짜: 광무 6년(1902년) 8월 9일

발행 기관: 대한제국 외부(大韓外部)

주요 흔적: 좌측 상단에 찍힌 파란색 인장은 1902년 10월 14일 샌프란시스코 항(Port of San Francisco)을 통한 미국 입국 확인 도장입니다. 이는 도산 선생이 미주 한인 사회의 개척자로서 첫발을 내디딘 공식적인 ’시작점’을 증명합니다.

결혼 다음날 미국행 배에 오르다!, 1902년 11월

인천항에서 배가 떠났다. 신혼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결혼 다음 날 바로 배에 오른 안창호는 일본 도쿄를 거쳐 태평양으로 나아갔다. 당시 태평양을 오가던 증기선 — Pacific Mail사의 S.S. Korea, S.S. Siberia 같은 선박들 — 은 인천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하와이와 캐나다 밴쿠버를 경유해 3주 넘게 항해했다. 오늘날 비행기로 열 시간이면 닿는 거리를, 파도에 흔들리며 21일 이상 버텨야 했다.

그 3주의 항해가 그에게 이름을 주었다.

망망대해 한가운데, 며칠 만에 처음 보이는 육지 — 석양 속에 솟아오른 하와이의 산. 끝없는 파도에 무너지지 않는 섬. 안창호는 그 순간 자신의 호를 도산(島山) 이라 정했다. 파도 위의 산처럼, 민족의 고난 속에서 흔들리지 않겠다는 다짐이었다.

그것이 첫 번째 항해였다. 그리고 그 다짐은 이후 30년 동안 그를 다시, 또 다시 배에 오르게 만들었다.

왜 이렇게 많이 움직였는가?

도산이 평생 가로지른 거리를 지도에 그리면 태평양을 세 번 건너고, 시베리아를 횡단하며, 유카탄반도 끝까지 이어진다. 비행기도 없던 시대에, 그는 왜 이토록 쉬지 않고 움직였을까.

이유는 단 하나였다. 독립운동에 필요한 모든 것이 사방에 흩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나라를 빼앗긴 조선 땅에서는 조직도, 자금도, 연설도 허용되지 않았다. 일제의 감시망 아래에서 독립운동의 씨앗을 뿌릴 수 있는 땅은 해외뿐이었다. 미주의 교민은 재정이었고, 러시아의 한인은 군사적 가능성이었으며, 상해는 외교의 무대였고, 멕시코의 노동자들은 잊혀서는 안 되는 민족의 일부였다.

이 모든 점들을 하나로 잇는 선은, 직접 몸으로 그어야 했다.

전보와 편지로는 마음을 움직일 수 없었다. 도산은 누구보다 그것을 잘 알았다. 연설의 힘, 눈을 마주치는 힘 — 그것이 그의 가장 강력한 무기였고, 그 무기를 쓰려면 반드시 그 자리에 있어야 했다.

세 번의 태평양, 그리고 시베리아

도산은 태평양을 세 번 건넜다. 매번 3주가 넘는 항해였다.

1902년 첫 번째 항해는 유학을 명분으로 했지만, 샌프란시스코에 닿자마자 계획이 바뀌었다. 먼저 온 한인들이 서로 다투고 미국인들의 조소거리가 되는 현실을 목격한 그는 유학을 포기하고 교민 조직에 뛰어들었다. 배로 건넌 바다가 그를 다른 사람으로 만든 것이다.

1907년 귀국길에는 일본 도쿄에 들러 유학생들을 만나 강연회를 열었다. 배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다음 일정이 이미 잡혀 있었다. 그는 이동 중에도 멈추지 않았다.

1910년, 나라가 일제에 완전히 넘어간 그해, 도산은 탈출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직선으로 미국에 가지 않았다. 일제의 감시망을 피해 중국 →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 시베리아 횡단철도 → 유럽 을 거쳐 1911년에야 미국으로 들어갔다. 1년이 넘는 우회였다. 그 우회로 위에서 그는 연해주와 북만주의 한인들을 만났고, 유럽 시민사회의 조직 방식을 눈으로 배웠다. 쫓기는 길이 탐색의 길이 되었다.

멕시코 유카탄까지, 10개월의 순방 (1917~1918)

1917년, 도산은 멕시코로 향했다. 멕시코 유카탄반도의 에네켄(애니깽) 농장. 그곳에 수천 명의 한인 노동자들이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는 참혹했다. 1905년 ’이민’이라는 이름으로 배에 실려 간 사람들이 실상은 계약 노동자, 사실상 노예에 가까운 처지로 일하고 있었다. 언어도 모르고, 돌아갈 방법도 없으며, 자신이 어느 나라 사람인지조차 점점 잊혀가고 있었다.

도산은 약 10개월을 이 땅에서 보냈다. 농장을 돌아다니며 직접 노동자들을 만났다. 그리고 말했다. "당신들은 대한의 국민입니다." 독립운동의 명분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돌려주는 말이었다. 먼지와 땀 속에서 그는 독립 자금 모집의 씨앗을 뿌렸고, 중남미 한인 네트워크의 기초를 놓았다.

이 10개월의 여정을 위해 도산이 탄 것은 기선이었고, 중간에는 비포장 도로 위 마차였으며, 때로는 도보였다. 편안한 여행이 아니었다. 그 불편함이 그에게는 당연한 것이었다.

여행권(旅行券) — 시대를 가로지른 신분증

도산의 이동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그가 소지했던 여행권들이다.

그는 생애 동안 네 종류 이상의 여행권을 사용했다. 1902년 대한제국 외부에서 발행한 집조(執照),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청국총영사관이 발행한 호조(護照), 1924년 중국 상해에서 발급받은 호조, 1929년 필리핀 방문을 위한 중국 호조. 나라 없는 독립운동가는 나라마다 다른 신분으로 입국해야 했다.

그리고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의거 직후, 프랑스 경찰이 그의 여행권을 압수했다. 그것이 마지막 여행권이었다. 그 날로 도산의 이동은 영원히 끝났다.

1919년 상해행 — 가장 중요한 항해

3·1운동의 함성이 채 가시기 전인 1919년, 도산은 다시 배를 탔다. 목적지는 중국 상해.

미국에서 상해까지, 태평양을 건너고 중국 본토를 거치는 이 항해는 그의 생애에서 가장 역사적인 이동이었다. 상해에는 임시정부가 세워지고 있었다. 하지만 파벌과 이념이 달랐고, 누군가 모두를 아우를 사람이 필요했다.

도산은 내무총장으로 취임해 임시정부의 조직 체계를 직접 설계했다. 그가 상해에 도착하지 않았다면, 임시정부가 그 초창기에 어떤 모습이었을지 알 수 없다. 그 항해 하나가 역사를 바꿨다.

도산의 여행이 가르쳐 주는 것

도산 안창호의 여정을 오늘의 눈으로 보면, 한 가지가 분명해진다.

그는 이동 자체를 독립운동으로 삼았다. 샌프란시스코에서 흥사단을 만들고, 유카탄에서 노동자들의 자긍심을 살리고, 상해에서 임시정부를 세우고, 필리핀에서 교민을 조직했다. 그 하나하나가 전략적으로 선택된 목적지였고, 그가 그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독립운동의 역사였다.

그는 이동 중 배 위에서, 기차 안에서, 낯선 도시의 여관에서 쉬지 않고 편지를 쓰고 연설을 준비하고 조직을 구상했다. 목적지에 도착하는 순간 다음 목적지가 이미 머릿속에 있었다.

그래서 그의 여행은 방랑이 아니었다. 지도 위에 독립을 그리는 일이었다.

이 중국 여권은 도산 선생이 ’국가 없는 국민’의 설움을 딛고 어떻게 국제적인 독립운동을 이어갔는지를 보여주는 매우 가슴 아픈 기록이자 전략적인 유물입니다.

1. 여권 세부 판독 정보 (좌측 페이지 중심)

성명(姓名): 안창호(晏彰昊)PM의 발견: 여기서 도산 선생은 자신의 본래 성씨인 ’안(安)’ 대신 발음은 같지만 한자가 다른 ’안(晏)’을 사용하셨습니다. 이는 일제의 집요한 추적과 감시를 피하기 위한 전략적 가명(Alias) 활용의 흔적입니다.

연령(年歲): 51세(五十一歲)1929년 필리핀 및 동남아 순방 당시의 연령과 일치합니다.

직업(職業): 교원(敎員)교육자로서의 정체성을 공식 신분으로 내세웠습니다.

국적(國籍): 중화민국(中華民國)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은 국제적인 이동권을 확보하기 위해 중국 정부의 배려로 중국 국적을 취득하여 활동했습니다.

여권 번호: 일자 제384호(逸字 第 三八四 號)

1. 발행처 및 기본 정보

발행처: 상해 주재 미국 총영사관 (AMERICAN CONSULATE-GENERAL, Shanghai, China)

발행 일자: 1924년 11월 13일

문서 종류: 섹션 6 증명서 (Section 6 Certificate)당시 미국은 ’중국인 배척법’을 시행 중이었으나, 상인, 학생, 여행자 등 특정 자격을 갖춘 이들에게는 입국을 허가했습니다. 도산은 이 법의 ’섹션 6’ 조항에 따라 ’여행자(Traveler)’ 자격으로 비자를 받았습니다.

비자 번호: 204/1924

2. 문서에 기록된 도산의 신상 정보 (사료적 가치)

이 문서에는 도산 선생의 개인 신상과 가족관계가 영어로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박물관 아카이브로서 가치가 매우 높습니다.

국적 관련: ’중국 시민으로 귀화한 한국 평양 출생자(naturalized as a Chinese citizen)’로 기록되어 있습니다.PM의 통찰: 이는 일제의 감시와 방해를 피하고 미국 입국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중국 국적을 취득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가족 관계:부인: 이혜련(Lee Hey Lun, 40세)

자녀: 필립(19세), 필선(13세), 수산(10세), 수라(7세)

거주지: 모든 가족이 로스앤젤레스(LA) 노스 피게로아 스트리트 106번지에 거주 중이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경력(Standing of Applicant):약 15년 전 샌프란시스코에서 대한인국민회(KNA)를 설립하고 회장을 역임한 사실.

상해 임시정부(Provisional Korean Government)에서 국무총리(Premier), 의정원 의원, 내무총장(Minister of Interior)을 지낸 사실이 공식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미국 정부가 도산의 정치적 위상을 공식 문서로 인정했음을 의미합니다.

3. 방문 목적 및 계획

목적: LA에 있는 가족 방문 및 중국 내 한인들을 위한 교육 방법 조사(investigate educational methods).

체류 기간: 8개월을 넘지 않는 조건.

미국 내 연고지: 부인 이혜련 여사의 주소(106 North Figueroa Street, LA).

미주도산기념관 건립, 전 세계 흥사단과 함께 — 5월 13일 공식 MOU 체결

미주 도산 기념사업회 곽도원 회장과 흥사단 미주위원회 이기욱 대표, 기념관 건립 공동 추진 협약 서명… 한국 본부 및 전 세계 단우들과의 연대로 사업 탄력

월간 도산 편집부2025년 5월

미주 도산 기념사업회(회장 곽도원)가 오는 5월 13일, 각계 애국단체들이 함께하는 공식 행사에서 흥사단 미주위원회(대표 이기욱)와 업무협약(MOU)을 체결한다. 이번 협약은 미주도산기념관 건립을 공동으로 추진하기 위한 역사적인 출발점으로, 양 기관의 긴밀한 협력 의지를 공식화하는 자리가 될 전망이다.

"미주 도산 기념사업회와 한국 흥사단 본부 등 전 세계 흥사단 및 단우들과 함께 미주도산기념관 건립을 공동 추진하게 되는 큰 의미가 있습니다." — 곽도원 회장

이번 MOU 체결은 단순한 두 기관 간의 합의를 넘어, 한국 흥사단 본부를 비롯한 전 세계 흥사단 조직 및 단우들이 하나의 목표 아래 결집하는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된다. 곽도원 회장과 이기욱 대표가 이끄는 양 기관은 이번 협약을 통해 기념관 건립의 구체적 로드맵을 함께 수립해 나갈 예정이다.

도산 안창호 선생의 정신을 기리는 기념관이 미주 땅에 세워질 경우, 한인 이민 역사와 독립운동의 흔적을 후세에 생생히 전달하는 소중한 공간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행사에는 여러 애국단체들이 함께 참여해 기념관 건립의 당위성과 역사적 의미를 공유할 예정이다.

미주 도산 기념사업회는 앞으로 흥사단 미주위원회, 한국 본부와 긴밀히 소통하며 기념관 건립의 구체적인 방향과 일정을 함께 마련해 나갈 계획이다. 전 세계 단우들의 지속적인 관심과 참여가 이 역사적 사업의 든든한 버팀목이 될 것이다.

도산 골프 토너먼트 2026, 오는 5월 12일 개최

미주도산안창호기념사업회, 도산기념관 건립 기금 마련 위한 골프대회 개최

미주도산안창호기념사업회(Dosan Ahn Changho Memorial Foundation)가 오는 2026년 5월 12일(화), 캘리포니아주 주루파 밸리에 위치한 오크 쿼리 골프 클럽(Oak Quarry Golf Club, 7155 Sierra Ave, Jurupa Valley, CA 92509)에서 ’도산 골프 토너먼트 2026’을 개최한다.

이번 골프대회는 도산기념관 건립을 위한 미주도산기념사업회의 문화 사업 기금 마련을 목적으로 열리며, 공동대회장은 제이 최와 카니 백이 맡는다.

일시: 2026년 5월 12일(화)

장소: Oak Quarry Golf Club (7155 Sierra Ave, Jurupa Valley, CA 92509)

체크인: 오전 9시 30분

풍성한 시상과 특별 경품

도산 골프대회는 단순한 친목 골프 행사를 넘어 초보자도 수상할 수 있는 다양한 시상 제도를 운영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번 대회에서도 양파상, 갈매기상, 오리상, 베스트드레서상, 행운상 등 다채로운 상이 마련되어 골프 실력에 관계없이 모든 참가자가 즐길 수 있도록 구성되었다.

특히 이번 대회의 하이라이트는 12번 홀 홀인원 도전으로, 성공 시 무려 $20,000의 상금이 주어진다.

경품으로는 한국왕복 항공권이 제공되며, 모든 PAR 3 홀에 상품이 준비되어 있다. 또한 5천 불 상당의 홀인원 상품과 근접상 상품, 유동훈 프로를 이기면 주어지는 특별 보너스(5번 홀)도 마련되어 있어 참가자들의 도전 의욕을 더욱 높일 전망이다.

"함께 걸어가는 것이 도산의 정신입니다"

사업회 측은 "도산 선생의 정신은 함께 걸어가는 데 있다"며, "이번 골프대회가 동포 사회가 하나 되어 도산기념관 건립이라는 뜻깊은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자리가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참가 문의는 전화 909-802-3219로 하면 된다. 뜻 깊은 행사인 만큼 동포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참여를 바란다.

본 대회 수익금은 전액 도산기념관 건립을 위한 미주도산기념사업회 문화 사업에 사용됩니다.

미주도산기념관 건립 후원 열기, 북가주·플로리다까지 확산

미주도산안창호기념사업회 회장은 최근 미주도산기념관 건립에 대한 공감대가 확산되는 가운데, 북가주 및 플로리다주에서 후원회 조직이 추진되고 있는 것과 관련하여 북가주를 직접 방문, 현지 한인 커뮤니티 리더들과 기념관 건립 지원 방안을 논의하고 돌아왔다.

이어 회장은 오는 5월 중순 한국을 방문할 예정이다. 이번 방한은 올해 말로 예정된 미주도산기념관 국제 건축공모전 및 건립 일정 추진과 관련하여, 한국의 정·재계 및 사회 각계 리더들과 협의하기 위한 것으로, 기념관 건립 사업에 대한 한국 측의 관심과 협력을 이끌어내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 4월의 작은 도산 — 넥타린의 아버지, 김형순 선생

김형순(金衡珣, Harry S. Kim, 1886~1977)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대한민국 정부, 2011년)

마트에서 흔히 보는 털 없는 복숭아 ’넥타린’. 이 과일이 100년 전 우리 한인 선구자의 손에서 탄생했다. 미주도산안창호기념사업회가 선정한 4월의 작은 도산은 캘리포니아 농업의 전설, 김형순 선생이다.

1903년 한국 최초의 이민선 통역관으로 미국 땅을 밟은 선생은 부인 한덕세 여사, 동지 김호 선생과 함께 ’김형제상회(Kim Brothers Co.)’를 세워 넥타린 신품종 18종을 미국 전역에 보급했다. 미연방 농무성으로부터 ’넥타린 왕’ 칭호를 받은 미주 한인 최초의 백만장자였다. 그러나 선생의 진면목은 번 돈을 쓰는 방식에 있었다. 대한인국민회와 임시정부에 꾸준히 독립자금을 지원했고, 총회관 건립에도 거액을 쾌척했다. 광복 후에는 전쟁고아 육아원 설립, 장학금 지원, 한인재단 설립으로 동포 사회의 재건을 도왔다.

도산 안창호 선생의 흥사단 단원으로서 무실역행의 정신을 삶으로 실천한 선생은 1977년 92세로 별세했으며 장례는 대한인국민회장으로 치러졌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도산의 정신을 잇고, 미주 한인의 미래를 세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