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의 작은도산: 황마리아 지사 - 하와이 사탕수수밭에서 피어난 독립의 꽃
- 4월 6일
- 2분 분량
황마리아 지사 (1865~1937)

1905년 봄, 한 중년 여성이 도릭호(Doric)의 뱃전에 서서 거칠고 낯선 태평양 바다를 바라보았다. 평양 출신의 황마리아, 나이 마흔에 자녀들의 손을 이끌고 하와이 노동 이민 길에 오른 것이었다. 맏딸 강혜원(19세), 아들 강영승(17세)과 함께 도착한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가피올라니, 키파훌루, 에와의 뙤약볕 아래 펼쳐진 사탕수수밭이었다.
낮에는 고된 농장 일을 버텨내고, 밤에는 딸과 며느리 강원신과 함께 세탁·수선 일로 생계를 이어갔다. 그러나 그 고단한 이민자의 삶 속에서도 황마리아 지사의 마음은 언제나 조국을 향해 있었다. 그녀의 한숨과 땀방울은 훗날 미주 한인사회와 조국 광복 운동의 든든한 토대로 쌓여갔다.
도산 선생과 함께한 독립의 길
황마리아 지사와 도산 안창호 선생의 인연은 그녀의 가족 전체가 도산 선생의 노선과 뜻을 함께했다는 점에서 더욱 각별하다. 사위 김성권 지사는 도산 선생이 샌프란시스코에서 이끌던 공립협회에 일찍이 가입하였고, 미주 최고 통일 기관인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를 탄생시키는 산파 역할을 했다. 맏딸 강혜원 지사는 도산 선생의 권면으로 창설된 '대한여자애국단'의 초대 총단장으로 선임되어, 도산 선생의 부인 이혜련 여사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광복 운동을 후원했다.
황마리아 지사 스스로도 조국 광복의 외교·선전 노선에서 도산 선생이 이끄는 대한인국민회와 긴밀히 연대하였다. 어머니에서 딸, 사위, 며느리에 이르기까지, 온 가족이 도산 선생과 하나의 뜻으로 독립운동의 최전선에 섰다.

한인 여성들을 하나로, 스무 해의 헌신
1909년, 일제의 강제 병합 반대 행사에 의연금을 낸 것을 시작으로 황마리아 지사의 공적 활동은 멈추지 않았다. 1913년 4월, 호놀룰루에서 그녀는 뜻을 같이하는 여성들을 모아 '대한인부인회'를 직접 창설하였다. 국어 교육 장려, 일본 상품 배척, 동포 구제를 목적으로 한 이 단체의 재무와 회장직을 맡으며 그녀는 흩어진 한인 여성들의 힘을 하나로 모으기 시작했다.
그 힘이 가장 크게 빛난 것은 3·1 운동의 감동이 하와이를 뒤흔든 1919년이었다. 3월 15일, 황마리아 지사는 하와이 각지의 부녀 대표 41명을 한자리에 불러 모아 '대한부인구제회' 창설을 주도하였다. 이 단체는 독립운동 후원과 외교 선전의 지침을 대한인국민회의 노선에 따르기로 결의하며 임시정부를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부녀들이 가정 살림을 아끼고 모은 애국금은 무려 20만 달러에 달하였고, 이 자금은 임시정부 지원과 외교 선전, 만주 독립군 구호, 그리고 3·1 운동 부상 애국지사 가족들의 생계를 지탱하는 데 쓰였다.
이후로도 황마리아 지사의 걸음은 쉬지 않았다. 1930년 임시정부 집중 지원을 위한 하와이 한인협회 발기인으로 나섰고, 1934년 미감리교회 부인보조회 회장을 맡아 국어 교육과 사회 개량에 힘썼다. 1936년에는 김구 선생에게 군인 양성 자금 100달러를 직접 송금하였다.
1937년 8월 5일, 황마리아 지사는 눈을 감았다. 이민 노동자로서 이국의 땅을 일구면서도 한 번도 조국을 잊지 않았던 그녀의 삶은, 작은 힘이라도 모이면 역사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오늘의 우리에게 조용히 일깨워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7년, 그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사탕수수밭의 한 이민 여성이 뿌린 씨앗은, 하와이 한인 여성 독립운동의 뿌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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