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의 작은도산: 이대위 선생 - 100년전 명예 주미 한국대사
- 2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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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수정일: 2월 3일

100년 전 샌프란시스코, 우리에겐 '이대위'라는 이름의 정부가 있었다"

젊은시절 이대위 선생 사진

AI로 복원한 사진
이대위 (1878~1928)
1995년 건국 훈장 독립장 추서
1.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총회장
2. 상항한인감리교회 목사
3. 신한민보 주필
4. 이민국 통역관 및 항구 선교사
5. 최초의 UC 버클리 한인 졸업생
"100년 전 샌프란시스코,
우리에겐 '이대위'라는 이름의 대사관이 있었다"
1. 평양의 수재, 샌프란시스코의 노동자가 되다 (탄생과 유학)
이대위 선생은 구한말 격동기에 태어나 신학문을 접하고, 더 큰 배움을 위해 과감히 태평양을 건넌 '초기 유학생'이었습니다.
탄생과 배경: 1878년 12월 28일, 평안도 강서(또는 평양)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평양의 기독교 학교인 숭실학당에서 수학하며 일찍이 서구 학문과 기독교를 접했습니다. 당시 그는 한학(漢學)과 근대 학문을 모두 섭렵한 준비된 인재였습니다.
미국행 결심과 노동: 1903년 4월, 25세의 나이에 단신으로 미국 유학길에 오릅니다.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그는 생계를 위해 약 2년 반 동안 막노동을 하며 영어를 익혔습니다. 입국 서류에는 나이를 3살 줄여 기재할 정도로 배움에 대한 열망이 간절했습니다.
한국인 최초의 UC 버클리 졸업생: 그는 늦은 나이인 27세에 포틀랜드 아카데미(중등 과정)에 입학해 3년 만에 졸업했습니다. 이후 1908년 캘리포니아 주립대(UC 버클리)에 입학하여 역사학(History)을 전공했습니다. 그가 역사를 전공한 이유는 서구 문명의 발자취를 통해 조국의 근대화 해법을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1913년, 그는 한국인 최초로 이 대학에서 문학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2. 도산 안창호와의 인연: "동갑내기 평생지기"
이대위와 안창호는 1878년생 동갑내기이자 같은 평안도 출신으로, 미주 한인 사회를 함께 일군 영혼의 파트너였습니다.
오랜 인연: 두 사람은 미국에 오기 전 평양에서부터 알던 사이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안창호가 1902년, 이대위가 1903년에 도미하여 샌프란시스코에서 재회했고, 1903년 미주 최초의 한인 단체인 '친목회'를 함께 결성했습니다.
굳건한 신뢰: 안창호가 1913년 흥사단을 창립할 때, 목사였던 이대위에게 창립식의 '서약 안수례'를 부탁할 정도로 깊이 신뢰했습니다. 안창호가 비전을 제시하는 지도자였다면, 이대위는 그 비전을 현실화하는 행정가이자 조력자였습니다. 두 사람은 국민회의 초석을 놓은 동지로서 서로를 의지했습니다.
3. 목사가 된 과정과 종교적 역할 ("나라 사랑이 곧 신앙이다")
이대위 선생은 단순한 종교인이 아니라, 교회를 독립운동의 기지(Base camp)로 만든 실천적 목회자였습니다.
목회자가 된 과정: 그는 원래 '전도'를 목적으로 도미했을 만큼 신앙심이 깊었습니다. 1911년 상항한인감리교회의 제3대 전도사로 부임했고, 1912년 목사 안수(Deacon)를 받았습니다. 이후 학구열을 이어가 1918년에는 샌프란시스코 신학대학원에서 신학사 학위까지 취득했습니다. 그는 1928년 과로로 순국할 때까지 17년 동안 이 교회를 담임했습니다.
교회를 '독립운동 본부'로 만들다:
공간 공유: 1914년, 이대위 목사는 교회를 샌프란시스코 오크 스트리트(Oak Street) 1053번지로 이전했는데, 이 건물은 바로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회관이었습니다. 즉, 평일에는 독립운동 본부로, 주일에는 예배당으로 사용하며 종교와 독립운동을 한 공간에서 통합시켰습니다.
민족 교육: 1910년 교회 내에 '국어학교'를 세워 이민 2세들에게 한글과 역사를 가르쳤습니다. 또한 월간지 『대도(The Korean Evangel)』를 발행해 기독교 복음뿐 아니라 민족의식과 근대 지식을 전파했습니다.
'항구의 선교사' (Port Missionary): 그는 미국 감리교단으로부터 '항구 선교사'로 임명받아 앤젤 아일랜드 이민국에서 통역과 보증을 섰습니다. 여권 없는 유학생과 '사진 신부'들에게 이대위 목사는 미국 입국의 문을 열어주는 실질적인 구원자였습니다.
신앙관: 그는 "하나님 사랑과 나라 사랑은 한 샘에서 나온다"고 설교했습니다. "민족의 허물과 수치는 우리 자신의 피 흘림 없이는 씻을 수 없다"며 독립운동을 기독교적 십자가 희생과 연결했습니다.
정리
엘리트의 헌신: "그는 버클리 대학을 나온 엘리트였지만, 편안한 학자의 길 대신 가난한 이민 교회 목사와 독립운동가의 가시밭길을 선택했습니다."
동갑내기 우정: "도산 안창호가 떠돌며 독립운동을 할 때, 샌프란시스코 본부를 묵묵히 지키며 자금을 대고 조직을 관리한 '안살림꾼' 친구가 바로 이대위였습니다."
교회의 재정의: "그가 만든 교회는 단순히 기도만 하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낮에는 독립을 외치고, 밤에는 한글을 가르치며, 주말에는 흩어진 동포들을 하나로 묶는 '망명 정부의 청사'였습니다."
이대위 선생의 삶은 지성(History Major), 영성(Pastor), 그리고 애국심(Activist)이 완벽하게 조화된 사례입니다.
이대위 선생 이야기를 라디오로 들어보세요!



대한인국민회 기념사진(1913), 오른쪽 세 번째가 이대위 선생이다.

이대위 선생이 워싱턴의 노동부 담당자에게 보낸 문서,
한인 입국문제에 대한 도움을 요청하고 있다.
이처럼 이대위 선생은 한인동포들의 미주 입국과 정착을 도왔다.

클래어몬트 학생양성소 교사들과 함께 있는 이대위.(윗줄 두번째)
클래어몬트 학생양성소는 미주 공립협회가 민족주의 교육의 장려를 위해 1908년 설립한 한인 공립학교다.
이대위 선생 오른쪽이 도산 선생이다

「신한민보」특별 포고문(1918.11.28.)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북미지방총회는 윌슨 대통령에게 승전치하서를 보내고 시국문제에 대한 건의서를 중앙총회에 제출했다.

이대위 선생 부고 기사 (동아일보 1928.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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